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 데 
 끊임없이 활용되어 온 국가보안법의 역사 

이승만 정권, 국가보안법을 만들다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여순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보고 놀란 이승만 정권은 비상시기라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되는데요(11월 9일).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껴온 법안에 당시 국회의원 48명이 ‘폐기동의안’을 상정할 정도로 반대가 심했지만, 법안 제출 한 달도 되지 않은 12월 1일 국보법이 제정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10호 법률이었습니다.

국보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1949년 한 해에만 약 12만 명이 입건되고, 백 개가 넘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됩니다. 전국 형무소 재소자의 80%가 국보법 위반 사범이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형무소를 신설하고 판검사를 특별임용해야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그 위용이 대단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이에 더해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제정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소장파 의원들을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몰아 13명을 구속합니다(1949년 6월).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 부역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까지 해체되었으니 전쟁도 나기 전에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했습니다 ⓒ너머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했습니다 ⓒ너머

한국전쟁 후에도 계속된 정치적 학살

한국전쟁까지 겪은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정적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바로 ‘진보당 사건’입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이 1956년 3대 대선에서 각종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30% 넘게 득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대법원 확정판결도 나기 전에 정당을 해산시키고 당수인 조봉암 선생을 사형시킵니다.

 

반대 여론 입막음에 국보법과 반공법을 휘두른 박정희 정권

4.19의 열망을 짓밟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국가보안법으로 모자라 ‘반공법’을 추가로 제정합니다. 이 반공법의 주요 내용이 바로 지금껏 악용되고 있는 ‘회합 통신’과 ‘찬양 고무’조항입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가보안법으로 1,968명, 반공법으로 4,167명이 검거되었다니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는데요. 이 시기의 탄압 양상은 크게 유학생 사건(동백림 사건, 재일 동포 유학생 사건), 지하정당 사건(통일혁명당, 인혁당 재건위, 남민전), 언론탄압 이렇게 3가지로 나뉩니다.

특히 언론탄압은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건, MBC 황용주 사장 필화사건, 남정현 작가 ‘분지’ 필화사건, 김지하 ‘오적’ 사건, 한승현 변호사 ‘어떤 조사’ 필화사건, 리영희 ‘8억 인과의 대화’ 필화사건이 모두 박정희 정권하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국보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절이었습니다.

 

국보법 통폐합한 전두환, 국보법이 민주화운동 탄압의 도구로

전두환 정권은 반공법을 폐지해 국보법으로 흡수시키는 방법으로 법안을 개정하는데, 이때 개정된 법안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국가보안법의 골격이 됩니다. 당시에는 5.18의 영향으로 재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이 무섭게 성장하는 국면이었는데, 전두환은 이를 탄압하기 위해 국보법을 거침없이 휘두릅니다.

학생운동 조직사건인 ‘학림’, ‘부림’, ‘민추위’, ‘구국학생연맹’, ‘삼민투위 사건’을 비롯해 ‘서울노동운동연합’, ‘제헌의회 사건’ 등 ‘누구든 모여서 이야기하면’ 안기부가 나서서 모두 조직사건으로 조작했습니다.

 

통일운동 탄압에 앞장선 노태우 정권

6월 항쟁으로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통일운동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게 됩니다.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방북에 나선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 학생이 국보법상 ‘잠입 탈출’ 혐의로 구속되고,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을 북측에 보내 전시했다는 이유로 홍성담 화백이 구속되는 등 통일의 열망을 짓밟는데 국보법이 활용됩니다.

 

김영삼 정권 입맛에 따라 ‘7조 찬양 고무’로 귀에 걸고 코에 걸고

김영삼 정권은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국보법을 활용한 케이스입니다. 적용 기준이 가장 광범위한 국보법 7조 ‘찬양 고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있어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안기관이 사건을 만드는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구속을 하는 방식입니다.

95년도부터는 이른바 ‘조직사건’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데, 95, 96년에만 11개 대학에서 ‘자주대오(활동가 조직)’사건이 터집니다. 조직사건으로 재미를 본 김영삼 정권은 역사상 최다 조직사건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정권 말까지 수도 없는 조직사건을 만들어 냈고, 심지어 이미 3~4년 전에 해체된 조직까지 당겨다가 구속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한총련 이적 규정이 있었습니다.

각 정권별 국가보안법 입건자 대비 기소 현황 ⓒ너머
각 정권별 국가보안법 입건자 대비 기소 현황 ⓒ너머

정권교체와 6.15선언 이후에도 변함없는 국가보안법

1997년의 한총련 이적규정으로 전국의 학생회 대표자들에 대한 수배조치가 이뤄졌습니다. 이 조치는 2001년에 선별수배 방침으로 변경될 때까지 지속되는데, 이 기간에 한총련 이적 규정으로 사법처리된 대학생만 762명에 이릅니다. 한총련 수배자였던 故 김준배 열사의 은신처를 제보하는 대가로 무려 3천500만 원을 제안할 정도로 국보법 광풍이 불었던 시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의 정상이 만난 6.15선언 이후에도 ‘송두율 사건’, ‘이시우 사건’, ‘한청 이적 규정’, ‘실천연대 사건’, ‘범민련 사건’, ‘일심회 사건’ 등 공안기관과 국보법의 존재감은 여전했습니다.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국가보안법의 생명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2004년에 1천 명의 단식투쟁으로 국가보안법이 폐지의 문턱까지 갔지만 결국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됩니다.

그 이후 이명박근혜 보수 정권에 들어서며 국보법은 더욱 활개를 칩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그중에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내란음모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짚을 수 있겠습니다. 이 사건은 형법상 ‘내란음모’라는 이름표를 갖고 시작되었지만, 대부분 국보법 위반으로 결론이 났고 실제로 국보법 사건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가져온 사건입니다. 공안기관이 먼저 발표하고 언론을 동원해 여론재판부터 마친 후에 형식상의 재판이 열리는 방식인데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국면을 전환하고, 조직사건의 형태를 차용했으며, ‘종북’의 이미지를 덧씌워 자주통일세력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해방 이래 축적된 공안기관의 노하우가 집약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진보정당 집권, 같이 갈 수 없어

진보정당의 성장점마다 거짓말처럼 국보법이 끼어들어 판을 엎어 놓습니다. 분단사회의 토대에서 국보법이 규범을 만들고 공안기관이 집행권을 행사하는 한, 진보정당의 성장은 그 통제선 내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21대 국회는 여당이 반수 이상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국보법을 폐지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들에게 의지가 없다면 국민들의 힘으로 만들어내야겠습니다. 진보당이 <국가보안법폐지 국민행동>과 함께 ‘10만 국민동의청원’으로 그 길을 열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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