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대한민국 암약 간첩단 일망타진”

국가보안법으로 간첩을 잡으면 위와 같은 무시무시한 제목의 뉴스가 보도됩니다. 그리고 사법부는 사형, 무기징역 등 어마 무시한 형량을 선고 합니다. 그리고 곧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그 동안의 국가보안법 사건 루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은 달랐습니다. 마치 간첩이 서울시에 침투해서 정보를 몰래 빼내, 북한에 넘긴 것처럼 사건이 공개되었지만, 곧 있었던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 증인들이 매우 허술하게 ‘조작’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불과 2년이 안된 시간 동안 열린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증거와 증인 조작에 가담한 국정원 직원들을 고발당했고, 싸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그렇게 쉽게 간첩을 조작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73년간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만 있으면, ‘아주 쉽게’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간첩으로 조작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그리고 2013년도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간첩을 조작하는 국정원과 싸우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 ⓒ너머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 ⓒ너머

한국에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2004년도에 들어왔는데 탈북민들이 2,000명이 넘지 않은 시대였어요. 저는 북한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공부를 했고, 병원에서 근무를 했어요. 누구나 그럴 것 같은데 처음에 자기가 배운 것을 가지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꿈과 희망과 기대가 있잖아요. 당시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북한에서는 약품들이 없었어요. 약이 제대로 공급이 안 돼 치료가 안 되고, 치료가 안 되다 보니까 사망에 이르게 되고, 수술 중에 환자가 죽어나가니까 이제 갓 의대를 나온 신입의사였던 저는 그 상황 자체가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때 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이 한국으로 먼저 탈북했어요. 그 친구가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되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한민국의 의학기술이 세계적으로 알아주고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약이 없어서 죽는 일이 없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탈북할 마음을 세우게 되었고, 기회가 생겨 한국으로 탈북하게 된 겁니다. 국정원에 진술할 때도 의대에 가고 싶어서 왔다고 이야기했어요.

 

서울시 공무원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의대 공부를 한창 할 때 어머니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너무 힘들어서 공부를 못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다음 해에 서울에 있는 다른 사립대를 갔습니다. 졸업할 시기에 교수님들하고 상담도 많이 하잖아요. 그때 서울시에서 최초로 북한 이탈 주민 상대로 계약직 공무원 모집공고가 올라왔고, 저는 꼭 되리라고 생각지 않고 그냥 응시했는데 합격한 거에요. 대한민국 최초로 탈북민 1호 공무원이 된 거에요. 당시 다른 무역회사 등 월급이 훨씬 높은 곳도 취업이 되었는데, 교수님이 ‘지금 보이는 것보단 공무원을 해보는 게 좋은 케이스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하셔서 공직으로 간 거죠.

 

서울시 공무원이 되고 어떠셨어요? 특히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은 업무가 과중하기로 유명한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요. 오히려 혼자 있으라고 하면 힘들어하는 타입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래도 영어를 쓰는 게 쉽지 않았고, 북한에서 살아왔던 방식이 있어서, 한국에서의 조직생활을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외에는 없었어요.

국가보안법에 긴급 체포가 돼 간첩으로 조작됐던 유우성씨 ⓒ너머
국가보안법에 긴급 체포가 돼 간첩으로 조작됐던 유우성씨 ⓒ너머

 

연행 당시 상황과 수사 받을 때는 어땠나요?
제가 2013년 1월 10일에 긴급체포가 됐어요. 20여 명의 국정원 직원들이 몰려와서 압수수색을 진행했어요. 국정원으로 연행됐는데, 처음 갔을 때는 상담을 했어요. 직급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와서 ‘대한민국 생활이 어떠냐’ 등의 질문을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요.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낸 뒤 다른 사람이 와서 ‘이것은 이야기니까 그냥 들어봐라. 꼭 네가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줘요. 탈북자 정보 1만 명을 넘기고, 북을 드나들고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중에 수사 받을 때 제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았어요. 국정원에서 계속 말한 대로 이야기하라는데, 저는 ‘그럴 수 없다’며 10일 동안 버텼어요.

그때 수사관들이 하는 말이 ‘너는 너무 고집이 세고, 머리가 안 돈다. 잘 생각해보면 네 동생도 살리고, 너도 사는 길인데, 가볍게 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했다’고만 하면 혜택도 있고 한국에서 잘 살 수 있고, 간첩이래서 죽는 것도 아닌데 그냥 전향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가족이 (북쪽에) 인질로 잡혀있고, 어쩔 수 없이 (간첩 행위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수 있대요. 그런데 안 한걸 어떻게 했다고 이야기해요? 그럴 순 없잖아요.

자신이 간첩이 된 것을 언제 알았나요?
조사를 열흘정도 받은 이후에 갑자기 언론에서 ‘간첩 잡았다’고 보도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제 핸드폰 전화번호를 털어봐야 북한 이탈주민 전화번호가 50명도 안 나오거든요? 근데 만 명이라는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고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국정원에서 댓글조작사건으로 언론에서 엄청 시끄러울 때였어요. 갑자기 간첩을 잡았다니까 국정원 댓글 조작사건은 아예 쏙 들어가고 간첩이야기밖에 없었죠.

저를 지원 해주던 신부님이 계셨는데, 갑자기 제가 연락이 안 되고 전화기가 꺼져있으니까 그때 그 신부님이 수소문하기 시작한 거예요. 신부님이 천주교인권위에 연락하고, 천주교인권위에서 민변에 연락하면서 제가 국정원에 잡혀 있는 게 알려졌어요. 처음에는 민변이 국정원에 ‘너네 유우성이라는 애를 데려갔어?’고 물으니 안 데려 갔다고 하다, 변호사들이 언론에 터뜨리겠다고 하니 그제야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국정원과 검찰이 유우성씨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탈북자 정보를 넘겼다고 주장하고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증거들이 다 조작한 것들로 밝혀졌어요.
제가 보니까 2006년부터 북한에 4~5번 정도 북한에 다녀온 걸로 되어 있더라고요. 북한에 갔다고 국정원과 검찰이 주장하는 시기에 맞게 국정원이 데려온 증인들이 있었어요. 한번은 마약중독자를 데리고 나온 적도 있어요. 그 사람이 마약중독자라는 건 제가 밝혔어요. 증인을 보니까 상태가 너무 안 좋고 진술하는 것을 보니까 의학적으로 봤을 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병원에서 마약 치료 받지 않았냐”고 물어봤어요. 그땐 그 사람이 자기한테 독이 된다는 걸 모르고 ’마약 많이 했다. 나는 그거 국정원에 이야기했다. 나는 마약중독자다‘고 재판부에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은 증언할 때 자신의 결혼식과 명절 날짜는 기억 못 하는데, 제가 북한에 갔던 10년 전 날짜는 기억하는 거예요. 판사님이 상식적으로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또 한 사람은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 고향이 같아요. 회령 사람인데 남자친구랑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데, 제가 빨간 옷 입고 지나가는 것을 봤대요. 2006년도에 본 일을 2013년도에 재판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초능력에 가깝죠. 판사님도 보니까 그게 불가능하거든요. 판사님이 직접 물어보셨어요. ‘왜 옷 상태를 기억하나?’고 하니 ‘북한에서는 옷을 잘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데 유우성이 유난히 옷을 잘 입고 다녀서 기억했다. 유우성 옷이 너무 멋있어서 자기 남자친구에게 사줬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그 사람이 국정원에서 말하는 제가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날짜에 정확히 북한에서 저를 봤다고 진술을 한 거예요. 변호사님이 그 사람에게 다시 물었죠. 탈북했던 경험이라든가, 특별했던 결혼식 날짜라든가, 특정한 명절날에 대해서, 그런데 이런 걸 잘 기억을 못해요. 그래서 그 당시의 제 사진을 보여줬는데 ‘이렇게 뚱뚱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본 게 제가 아닌거죠. 

또 다른 사람은 북한에서 우리 집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유우성 아빠랑 같이 술 한 잔 먹는데 우리 아들이 한국에서 간첩 일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한국에 같이 가자’라고 했다는 거예요. 증언하자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어요. 그 분의 남편분이 이야기했는데 국정원에서 2천여만 원을 줬대요. 아주머니가 생애 처음으로 큰 돈을 받아서 아이 앞에 돈을 펼치고, 사진을 찍고, 자랑을 한거예요. 그분의 남편이 나중에 기자한테 돈을 받았다고 해서 밝혀진 사실이에요.

이외에도 북한에 있었다는 사진, 통화기록 등의 증거 조작이 밝혀져서 1심에서 무죄를 받았어요.
 

유우성씨는 법정에서 변호사들의 조력을 받아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을 밝혀냈다. ⓒ너머
유우성씨는 법정에서 변호사들의 조력을 받아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을 밝혀냈다. ⓒ너머

 

그렇게 증거를 조작했던 국정원 직원, 검사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공소권 남용으로 대법원에 올라가 있어요. 지금도 계류 중이에요. 그 사건 이후로 국정원에 있던 조작에 가담했던 국장, 부장, 차장 기소되었고, 지금 재판을 받고 있어요. 당시에 제 동생을 구금하고 협박, 강압으로 수사했던 수사관들도 기소되어서 수사 받고 지금 재판 중에 있습니다. 근데 그때 당시의 간부들, 국정원에 지금도 다 있어요. 검사도 처벌을 받지 않았어요.

 

국정원과 검찰과 지금까지 싸우고 계신 데, 그 당시부터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동생과 같이 안전하게 보호를 해주고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라는 회유를 많이 했는데, 사실 그때는 저는 죽을 각오를 가지고 싸웠어요. 제가 그 이상으로 혜택을 준다고 해도 죽으면 죽었지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복지과에서 일을 했고, 더 나아가서 신부님들과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정착 프로그램, 멘토 프로그램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도움을 주었어요. 그분들이 저한테 도움을 준 것은 뭔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뭔가 따뜻한 마음? 저의 진심을 보고 도와준 거잖아요. 저에게 도움을 많이 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제가 간첩이라고 인정하면, 결국 다 배신하는 거예요. 국정원에선 ‘너를 나중에는 다 이해해 줄 거다’고 얘기했는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수사관님, 저는 인정 할 수 없습니다. 조상, 집안을 위해서라도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인생이 더 많은데 나중에 내 친구, 가족한테 뭐라고 말하나요. ‘잘 살아보자’고 거짓말 한 거고 ‘사실은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제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한국사회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제가 제일 후회되는 것은 서울시에서 근무할 때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인권적으로 부당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주변에 탈북자 분들 중에서 합신센터에서 욕설도 먹고 강제로 조사도 받고 불려다니는 분들이 있었거든요. 어떤 분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아주 무서운 법이 있다는 뉘앙스로 저한테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그 사람들을 하나같이 무시를 했었어요. 당신이 뭔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국정원이 조사하는게 아닐까? 이 사람들 가까이하게 되면 나까지... 상담을 해줬지만 가까이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결국 내 차례가 온거죠.

국가보안법은 국정원이 만물을 만들 수 있는 법이에요. 북한과 1%라도 연관이 있던 사람들은 간첩이 되었고, 그로인해 승진한 사람들은 지금도 잘 살고 있어요. 똑같은 일을 해도 누구는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해 벌금이나 가벼운 걸 받아요, 근데 누구는 국가보안법으로 징역 7년이 나와요. 자기들이 하면 화합이고, 우리가 하면 찬양이 돼요. 도저히 말이 안돼요. 법이라는 게 만인에게 평등해야 되고,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제지해야 되는데, 국가보안법은 강자한테 이롭고 약자한테 엄해요.

 

돌이켜 보면 엄청난 사건을 겪으셨는데, 국정원과 검찰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사실 그동안에 습관적으로 조작을 너무 쉽게 했던 일들이 한 번에 곪아서 터진 것 같아요. 국민들을 너무 쉽게 속일 수 있었고, 너무 쉽게 먹혔으니, 변하지 않았던 거죠.

유우성씨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너머
유우성씨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너머

 

앞으로의 계획과 진보당 7만 당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기회가 되면 다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그때 일을 끝까지 했으면 2년마다 계약이 갱신되고, 나중에는 서울시 무기계약직으로 근무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여러 사건을 겪은 경험자로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수 있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간첩 조작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와선 안 돼요.

국가보안법이 이름처럼 국가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고, 누구라도 조작 할 수 있고,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법입니다. 한반도를 사랑하고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폐지시켜야 해요.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통일은 한반도의 숙명이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풀어가야 할 숙제고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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