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는 ‘호모사케르’라는 존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로마의 평민 의결을 통해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이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신(神)에게 제물로 바쳐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한데 특이한 점은 누군가 이들을 살해해도 죄를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면책 살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공동체의 규칙에 의해 범죄자로 지목되었는데, 살인을 처벌하는 규칙에서는 예외 적용이 된다니 모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현대사회의 정치권력이 ‘호모사케르’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2022년에 가장 즐겨들은 노래를 꼽자면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다. 2021년에 발매된 노래인데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하더니 결국 윤하를 데뷔 이후 첫 지상파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이제는 도입부의 기타 반주만 한마디만 들어도 감정이 잡히지만 사실 이 노래에 관심을 가진 건 그 특이한 제목 때문이다. ‘사건’과 ‘지평선’의 조합이라니 태어나 처음 듣는 만남이었는데, 알고 보니 사건의 지평선이란 블랙홀의 경계를 뜻하는 오랜 물리학 용어였다. 블랙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으니 그 경계면을 사건의 지평
나온 지 3년이 된 드라마를 뒤늦게 챙겨보고 있다. 이라는 제목의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드라마이다. 아마 많은 당원이 이미 챙겨봤을 텐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내용도 좋고 만듦새도 좋다. 녹두장군치고는 덩치가 너무 큰 택이아빠 최무성 배우의 무던한 연기도 좋고 조정석 배우가 납득이의 냄새를 풍기며 별동대장 백이강을 연기하는 것도 볼만하다. 고종이 동학군에게 거병을 명하는 밀지를 줬다거나 하는 대목은 좀 황당하긴 했지만 큰 줄기에서 동학농민군의 이야기와 당시의 정세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극 중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삼례에서 2차
1440년경 금속활자를 발명한 독일 사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당시엔 성경 한 권을 필사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단한 재질의 금속활자를 이용해 성경을 마구 찍어냈으니, 교회와 사제들을 통해서만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성경 속 이야기가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기술의 발전은 지식의 권위를 낮추고 대중화하는 효과를 갖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궁금한 단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답을 찾을 수 있지만, 불과 20여
대선이 끝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선거운동을 했던 시간이 벌써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 그래프가 붙어 교차하던 3월 9일 늦은 밤의 기분이 생경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저뿐만이 아닐 것 같은데요.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애인 이동권 시위,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파문, 여가부 폐지 논란, 조민씨 입학 취소, 윤 당선자와 박근혜 씨의 만남, 검수완박과 한동훈 법무부장관 지명. 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윌 스미스의 폭력 사건도 있었네요. 최근엔 윤 당선자께서
얼마 전 작은 토론회에서 신지예씨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요. 그날 정말 진지하게 ‘제3지대’를 주장했습니다. 진보정치가 안철수와 김동연을 우리의 싸움판으로 유인하고 단일화에서 승리해 그 지지율을 흡수하자는 기획이었는데요. 다소 허황된 생각이 아닌가 싶었지만, 워낙 진심이 담겨있어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석했던 한 참석자는 ‘좀 책략적이지 않느냐’고 한마디 얹기도 했죠. 신지예씨의 행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중에 최악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그리 찰떡같이 알아보는 뛰어난
이제는 배우 김민석의 유명세에 밀려났지만,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김민석 하면 역시나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다가 잘 안 될 것 같으니 정몽준에게 날아가 버려 ‘김민새’라는 별명을 얻은 그 정치인을 떠올리기 마련이었습니다. 당락이라는 정치적 이익에 따라 되는 장사만 따라다니는 정치인들을 ‘철새정치인’이라고들 불러왔지요.그런데 이제는 언론에서 그런 말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김한길, 금태섭, 이용호 등 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윤석열 선대위에 참여한다는데 아무도 ‘철새’라고 부르지 않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87년 이래 총 22
학살자 전두환이 죽은 날로 기록된 11월 23일은 2021년분 종합부동산세(종부세) 고지서가 발송된 날이었습니다. 온통 ‘날벼락’ ‘폭탄’ ‘쓰나미’라는 수사가 나붙은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5천만 국민이 종부세 폭탄에 맞아 죽어 민중총궐기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데요.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사들이 모두 조악한 선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습니다.전체 종부세의 86.1%가 다주택자와 법인에 부과되었다는 사실. 종부세 고지서를 받은 사람은 국민의 2%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 20억
언젠가부터 ‘인싸’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싸는 내부자를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의 약자인데요, 반대말은 ‘아싸’라고합니다. 이 대목에서 ‘아싸 호랑나비’를 떠올리면 정말 구세대가 아닐 수 없는데, 여기서 아싸는 비주류를 뜻하는 ‘아웃사이더(outsider)’를 의미하죠. 흥미로운 것은 ‘인싸-아싸’의 유행에 앞서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행사나 술자리에 잘 오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쟤는 아웃사이더야’라고 지목하던 것이 나중에는 ‘나는 아웃사이더잖아’라는 자조의 용어로 활용되고 그다음
얼마 전 열린 독일 총선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진보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SPD)이 집권여당으로 올라섰습니다. 독일기독민주연합(CDU) 소속의 앙겔라 메르켈이 16년이나 총리로 살아왔으니 16년 만의 정권교체로 볼 수 있겠습니다.이번 선거 결과에서 하나 더 주목할 부분은 녹색당(Grünen)의 돌풍입니다. 67석에서 118석으로 51석이나 늘어났는데, 원내 6개 정당 중에 가장 작은 정당이었던 녹색당이 이번 총선을 통해 일약 원내 3당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녹색당의 돌풍 배경에는 예상하다시피 ‘기후 위기’가 있었습니다.
진보정당 간 정책의 중복이 놀랍진 않아더 큰 격차는 다른 곳에 있다솔직히 좀 섭섭합니다. 답답하기도 하고.지난 총선 때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나와 민중당(현 진보당)의 ‘전국민고용보험제’를 홍보했습니다. 반응이 꽤 괜찮았는데, 총선 이후 원외 정당이 되어버려 추진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정의당이 전국민고용보험 법안을 당론 발의했습니다. 진보정당 중에 가장 먼저 출마 선언을 한 김재연 대표가 ‘주 4일제’를 1호로 들고 나섰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어도 진보진영 내에서는 이 주제를 선점하겠다는 나름의 정무적 판단이 있
금속활자는 책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깜지를 쓰듯 붓과 펜으로 한 자 한 자 베껴야 하는 시절에 비하면 목판활자도 나쁘지 않았지만, 금속활자의 견고함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고 합니다. 금속활자를 통해 소수의 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지식의 원천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 금속 활자의 전파는 곧 문명의 전파였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70년대 말부터 전격 보급되기 시작해 80년대에 대중화를 이룬 ‘복사기’의 도입이 학생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더군요.만약 식민지배의 지배국가가 피식민지에 금속활자를 전파했다
정권은 정치 세력이 잡는 것입니다. 이건 제 오랜 소신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상식이고 정당의 존재 이유기도 합니다. 그 상식과 이유에 따라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가 대체로 비슷한 정치를 해왔죠.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거나 노동자를 개차반으로 취급한다거나. 몰상식하거나.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사람들을 A라고 하겠습니다. 반대로 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비슷한 정치를 해왔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뉘앙스를 매우 강하게 풍긴다거나 재벌 대기업과 손잡고 노동자의 발목을 걷어찬다거나. 이를테면 끝나버린 연극과 같은
해방 이래 이토록 ‘점령’이라는 단어가 세간에 오르내렸던 적이 있었을까요. 더 정확하게는 1945년 9월 7일에 ‘맥아더 포고령 제 1호’라는 문서명으로 조선 인민에게 고해진 38선 이남 ‘점령(occupy)’ 선언 이래로.미국은 점령이라는 묵직한 단어에 생명력을 불어넣듯 즉각적으로 여러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배격하고 미군정의 주권 행사를 확인했으며, 일본인들의 안전과 재산 보호를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을 전적으로 계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제 부역자들이 죽다 살아난 것도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전 총리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철의 신자유주의자’답게 집권하자마자 웬만한 국영기업은 다 민영화 해버렸고 감세도 전격적으로 단행했지요. 전국의 국영 탄광을 폐쇄한 대처 정부에 맞선 역사적 탄광노조 파업을 그려낸 영화가 바로 스티븐 돌드리 감독의 입니다.여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박용진 의원이 최근 법인세와 소득세에 대해 감세를 추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나라는 매출 상위 1% 기업이 법인세의 81%를 부담하고 있는데요
저는 야구의 세세한 룰을 이십 대 중반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야구장에 처음 가본 것도 이십 대 후반이나 되어서였습니다. 야구에 가깝지 않기로는 동네 친구들이 모두 비슷했는데요, 야구팬이 된다는 것은 선수와 경기데이터에 관한 얼마간의 암기력과 정보교류가 필수적인데, 아무래도 온 동네의 부모들이 야구를 즐길만한 계급적 사정이 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동네 꼬맹이들이 공유하던 스포츠 문화란 공중파가 일제히 중계하던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거나 AFKN을 통해 WWF 프로레슬링을 보며 서로의 알통을 만져보는 정도였습니다.
지난 5월 15, 16일 칠레에서는 제헌의회를 선출하는 역사적 선거가 열렸습니다. 여당 측의 우파연합인 ‘바모스 포 칠레(Vamos Por Chile)’가 참패하여 20%의 의석을 가져가는 데 그쳤고, 대부분 진보성향으로 알려진 무소속과 좌파연합세력들이 65%의 의석을 가져갔습니다. 헌법 초안에 대한 거부권을 보장받으려면 3분의 1 이상의 의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역사가 뒷걸음질 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칠레의 민중들은 이번 제헌의회 선거에서 세계 최초로 성비 균형제를 도입해 전체 155석을 남성 78명
아시다시피지난 4월 22일. 평택항에서 스물 세상의 청년 노동자 故이선호 군이 300kg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사망했습니다. 현장 인력반장이자 이선호 군의 아버지인 이재훈 씨가 일을 정리하기 위해 현장을 둘러보다가 ‘자는 듯이 엎드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기절해버렸다는 이 기막힌 사연은, 떠올리고 내뱉을수록 마음을 비좁고 캄캄하게 만듭니다.지난 5월 10일에는 서울 대림동의 한 주유소에서 카니발 차량 아래에 사람이 깔리자 10명의 시민이 모여들어 차량을 들어 옮겼다는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불현듯 그 카니발 차량의
인삼집 손녀딸 송명숙 후보는 건강합니다. 신림동에서 나고 자라 지난 총선에서도 그 동네에서 출마했더랍니다. 송 후보는 지금껏 청년학생사업을 하고 있지만 의외로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입문했던 케이스는 아닙니다. 졸업반이 다 되어서 접하게 된 진보사상이 청년의 가슴에 불을 댕겨 여태껏 뛰어온 것이죠. 이처럼 늦은 사람들의 특징은 활동에 대한 결단력과 의지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졸업과 활동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대부분의 선배들은 새내기들에게 더 정성을 쏟기 마련이니까. 본
얼마 전 느닷없이 용산참사가 떠올라 당시의 현장 동영상을 찾아봤습니다. 다시 보니 굉장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참혹했고, 그것이 사실로서 존재했다는 것에 전율했습니다. 왠지 2009년 당시의 느낌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고 너무 끔찍했습니다. 마치 너무 무서워 실눈을 뜨고 목격했던 일을 다시 정면으로 응시하는 듯했습니다.전혀 익숙해질 수 없는 그 장면에 대한 기억과 달리 그 소식을 인터넷으로 확인하던 2009년 1월 20일 아침의 눅눅하고 끈적했던 기분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오세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