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영하 10도. 살을 에는 듯한 이례적인 세밑 한파였지만, 울산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지난 12월 26일 오후 7시, 울산 남구 종하이노베이션센터 로비는 행사 시작 전부터 발 디딜 틈 없는 장사진을 이뤘다.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의 자전 에세이 <마음이 길을 만든다>를 손에 든 시민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마다하지 않았고, 김 구청장은 특유의 환한 미소로 일일이 눈을 맞추며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약 2,0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단순한 출판기념회를 넘어, 지난 20여 년간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진보정치의 외길을 걸어온 한 정치인에 대한 연대이자,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청사진을 확인하려는 열망이었다.
내빈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민주노총 초대 위원장)를 필두로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와 윤종오 원내대표, 정혜경 의원, 손솔 의원이 자리했으며,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등 노동계 주요 인사들도 참석해 힘을 실었다.
축사에 나선 권영길 전 대표는 김종훈 구청장을 '한국의 조란 맘다니'에 비유해 눈길을 끌었다. 뉴욕주 하원의원으로서 무상 보육과 교통 등 파격적인 공약을 실현하며 미국 정가에 돌풍을 일으킨 조란 맘다니처럼, 김종훈 역시 30년 전부터 무상 교육과 보육을 주창해온 '원조'라는 평가다. 그는 "김종훈이 걷는 길은 노동자가 마음 편히 일하고 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꿈 그 자체"라며, 이 책이 울산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설계도임을 강조했다.
노동자 김종훈에서 행정가 김종훈으로
김종훈의 삶은 한국 노동 운동사, 그리고 진보 정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현장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의 긴 한숨을 뒤로하고 그는 거리로 나섰다.
이번 신간은 그가 걸어온 투쟁의 기록이자, 행정가로서 써 내려간 치열한 보고서다. 조선업 불황으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 통지서를 받아들었을 때, 그는 거리에서 그들과 함께 울었다. 하지만 구청장이 된 김종훈은 눈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그 눈물을 닦아줄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냈다.
지자체 최초의 '노동복지기금' 조성, 하청노동자 지원 조례 제정, 그리고 공공부문 초단시간 노동 폐지.
이러한 정책들 이면에는 절박한 물음이 있었다. "도대체 정치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해고 노동자의 이 뼈아픈 질문이 그의 가슴을 쳤기 때문이다. 실직 후 대출 이자에 허덕이고, 신용 하락으로 제도권 금융에서마저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정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했다. 그가 취임 직후 1호 공약으로 노동복지기금을 밀어붙인 이유다.
책에 수록된 일명 '구청장 마트 습격 사건'은 김종훈식 행정의 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기습 입점을 시도하자, 그는 주저 없이 위생 점검 카드를 꺼내 들고 현장을 급습했다. 법과 제도의 미비함 뒤에 숨지 않고, 주민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행정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증명한 상징적인 장면이다.
책상 머리가 아닌, 새벽 첫차에서 찾은 '길'
그렇기에 <마음이 길을 만든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김 구청장은 책 제목에 대해 "내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이 보내주신 마음을 모아 더 큰 길을 내겠다는 다짐"이라고 밝혔다.
그의 다짐은 책상 위 활자에 갇혀있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마친 바로 다음 날, 그는 어김없이 첫차 운행을 준비하는 버스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칼바람을 뚫고 울산역행 첫차를 모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노선 개편으로 인해 불편해진 출근길을 감내해야 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책의 행간에 스며있는 민심은 이처럼 현장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책은 진보 행정의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어른들의 시각이 아닌 아이들이 직접 설계한 '미끄럼틀 없는 놀이터', 타지 청년들의 울산 정착을 돕는 '청년 노동자 공유 주택', 학부모들과 3년간 머리를 맞대고 학교 앞 안전과 교육 문제를 해결해온 '학부모 반상회'. 이는 관 주도가 아닌, 주민이 주인이 되는 '주민 주도형' 행정의 살아있는 교과서다.
나아가 그는 제조업 도시 울산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고민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풍력 에너지 산업 전략, AI 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의 노동을 지키기 위한 '경제 일자리 전략센터', 그리고 돌봄 도시와 완전 버스 공영제까지. 그의 시선은 과거의 영광이 아닌, 변화하는 산업 생태계 속에서 살아갈 시민들의 내일을 향해 있다.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청년 노동자와 학부모, 그리고 김 구청장과 30년 지기인 퇴직 노동자가 증언한 것은 김종훈 개인의 무용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보 정치가 주민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였다.
김 구청장은 인사말 도중 복지 사각지대에서 세상을 떠난 모자(母子)의 비극을 언급하며 잠시 목소리를 떨었다. "생명보다 귀한 가치는 없다"는 그의 절규는 공허한 구호가 아닌, 뼈아픈 반성이자 무거운 책임감으로 좌중을 숙연케 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미처 책에 담지 못한 분들의 마음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며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진보당의 유일한 기초단체장 김종훈. 그가 펴낸 <마음이 길을 만든다>는 결국 '사람'이 길임을 역설한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새벽 버스 차고지에서, 그리고 불 켜진 구청장실에서 그가 닦아온 길은 이제 더 넓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다. 이 책은 진보 정치가 실력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자, 당원과 시민들에게 함께 그 길을 걷자고 건네는 뜨거운 제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