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사회상속제, 자산 불평등을 넘어 새로운 출발선 만들기
자산이 출발선을 결정하는 사회
‘수저 계급론’,“열심히 살아도 따라잡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말은 청년들이 느끼는 단순한 체념이나 비관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노력과 소득을 통해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기대가 일정 부분 작동했습니다. 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소득을 늘리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경로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소득만으로는 격차를 따라잡기 어려워졌고, 자산이 삶의 출발선 자체를 규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산은 단순히 개인의 노력으로만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미 축적된 자산은 상속과 증여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전되고, 이 과정에서 격차는 반복되거나 더욱 확대됩니다. 이러한 구조가 유지된다면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출발선에서 이미 결정되는 문제로 굳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접근이 아니라, 출발선 자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입니다.
자산 격차는 이미 삶의 조건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자산 격차를 처음 또렷하게 느끼는 순간은 아주 이른 시기에 찾아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자취를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달라지고, 그 차이는 단순한 면적이나 위치의 차이를 넘어 삶의 질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채광이 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 곰팡이와 환기 문제, 치안과 안전의 문제는 모두 자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결과입니다. 이 경험은 청년들에게 자산 격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실제로 수도권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 청년의 경우,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어 반지하 방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습기가 올라오고, 환기가 쉽지 않아 건강 문제까지 겪게 되었지만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많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친구는 부모의 지원으로 보증금이 있는 오피스텔에 입주했고, 주거 환경뿐 아니라 생활의 안정성에서도 큰 차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출발했지만 부모의 자산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일상이 만들어집니다.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상당 부분 학자금 대출에 의존하게 되고, 많은 청년들이 “나중에 갚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교육을 받습니다. 그 결과 사회에 진입하는 시점에는 이미 일정 규모의 부채를 안고 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거를 마련하거나 결혼을 고민하는 시점이 되면 다시 한 번 ‘목돈’의 문제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합니다. 보증금, 전세 자금, 결혼 비용 등 삶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자산의 유무가 선택의 범위를 결정합니다.
최근 흐름을 보면 소득 격차는 정책적 개입과 이전소득 확대 등을 통해 일정 부분 완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자산 격차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자산은 소득과 달리 이미 축적된 규모가 클수록 추가적인 축적이 더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상속과 증여를 통해 세대 간 이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가 지속된다면 불평등은 단순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서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속을 다시 설계하자는 제안, 사회상속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안된 것이 ‘사회상속제’입니다. 사회상속제는 상속 자체를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또한 개인의 재산을 강제로 환수하자는 주장도 아닙니다.
핵심은 이미 존재하는 상속·증여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현재의 제도에서도 상속세는 걷히고 있습니다. 상속세는 본래 부의 세습을 완화하고 사회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재원이 일반 재정으로 흡수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청년 세대의 출발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사회상속제는 바로 이 지점을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매년 걷힌 상속·증여세를 별도의 기금으로 조성하고, 이를 청년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여 일정 기간 적립한 뒤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시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즉, 상속세를 단순히 걷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취지를 보다 분명하게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이 구조의 중요한 특징은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거나 세율을 인상하지 않고도 제도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현실성과 설득력을 동시에 갖는 제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상속제가 실제로 도입될 경우, 제도의 작동 방식과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도가 2026년에 도입됐다고 가정할 때, 상속·증여세를 기반으로 조성된 기금을 통해 청년 1인당 약 4천만 원 내외의 자산이 형성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자산은 매년 조성되는 재원을 일정 기간(11년) 적립한 뒤, 일정 연령(29세)에 도달한 청년에게 균등하게 배분되는 구조로 설계됩니다.
재원은 기존 상속·증여세를 기반으로 하며, 별도의 신규 세목을 도입하지 않고 운영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지급 방식은 일시 지급이 아니라 용도와 시기를 고려한 활용 체계를 포함하는 방안으로 설계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사회상속제는 상속세의 재분배 기능을 청년 세대의 출발 시점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제도가 됩니다.
빚이 아니라 자산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상속제가 도입되면 청년들의 출발 조건은 지금과 비교해 의미 있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 주거 비용, 생활비 부담 등을 안고 사회에 진입하는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단순한 경제적 부담을 넘어 삶의 선택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안정적인 소득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고,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이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반면 일정 수준의 자산이 주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상환함으로써 부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거 보증금을 마련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진로를 보다 주체적으로 선택할 여지도 넓어집니다. 이는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아니라 선택의 조건을 확장하는 정책적 효과를 갖습니다.
또한 사회상속제는 자산 격차의 세습을 완화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와 같이 상속 재산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청년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는, 동일한 재원으로도 1인당 배분 효과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지금은 사회상속제를 도입했을 때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기되는 우려는 무엇이고,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사회상속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우려가 함께 제기됩니다. 먼저 재산권 침해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회상속제는 상속 자체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미 부과되고 있는 상속세의 활용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산권의 본질적인 침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근로 의욕 저하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상속제는 대규모 자산을 제공하는 제도가 아니라, 최소한의 출발 기반을 마련하는 수준의 정책입니다. 오히려 현재와 같이 과도한 부채 부담이 존재하는 구조가 청년들의 선택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상속액이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작아서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10년대 후반에 제기된 청년사회상속제의 제안이 그렇습니다. (심상정, 2018) 당시 제안된 사회상속액은 1천만 원이었는데, 이는 ‘자산’상속보다 청년‘복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와 크게 다릅니다. 사회 전체의 자산불평등이 심화한 것은 물론이고, 세대간 자산불평등이 심각해졌으며, 피상속대상 자산 규모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여기에 인구구조에 따라 청년세대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사회상속액이 당시 추산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제는 사회상속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청년들에게 빚으로 시작하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 청년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상속제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특정 집단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출발선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입니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부가 그대로 대물림되는 사회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함께 나누는 구조로 전환할 것인지입니다. 이제는 그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사회상속제 도입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