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기본소득은 대안인가 

기본소득의 급진성은 가짜 급진성 
‘부자에게도 똑같이’라는 흐리멍덩한 구호보다 
어떻게 더 많이 뽑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김공회 교수
김공회 교수

지난 9월 28일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을 넘어 ‘기본사회’로 가는 30년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최소한의 삶을 지원받는 사회가 아니라 기본적 삶을 보장받는 ‘기본사회’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과연 현시기에 필요한 기획이자 제도정치권 안팎을 통틀어 근래에 보기 어려웠던 원대한 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제대로 현실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기본사회’ 비전은 기존의 ‘기본소득’론의 연장이고, 따라서 기본소득을 그 핵심 수단으로 삼고 있어서다.

기본소득과 기본사회는 이름만 비슷할 뿐 둘 사이엔 필연적 관련이 없다.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만으로 삶에 필요한 ‘기본’을 달성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대표도 기본소득과 더불어 기본서비스 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본소득론자들은 국가가 직접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늘 부정적이었다. 왜 그럴까? 보다 근본적으로, 왜 기본소득은 기본사회로 가는 ‘티켓’이 아닌가? 기본소득, 무엇이 문제인가?

 

상식에 도전하는 기본소득?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제란 국가에 의한 공적 소득보장제도의 하나로서, 국가가 시민 모두에게 지급하는 정액의 정기적인 화폐 급부를 기본소득이라고 한다. 모두에게 주니 기분 좋고, 액수도 똑같으니 싸울 일도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이런 돈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특히나 서민의 살림살이가 점점 팍팍해지는 요즘, 한 달에 10만 원, 20만 원이라도 정부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준다면 그것이 그들에겐 ‘가물에 단비’처럼 다가가리라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를 ‘나 자신’이 아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단돈 10만 원이라고 해도 그것을 매달, 모든 개인에게 준다면 연간 60조 원이 든다. 월 30만 원이면 매년 180조 원이다. 국가는 그 돈을 어디서 구할까? 사람들의 경제력이 천차만별일 텐데 모두에게 똑같은 액수로 주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이런 것들은 지긋하게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들이다. 국가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국가의 재정활동은 언제나 재원이 한정된 조건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꼭 보수·우파가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이자 현실이다. 이때 재정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제도는 선별적이고 차등적으로 설계하는 게 보통이다.

기본소득론은 이런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소득의 높은 인기도 그러한 저돌성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기본소득론에 대한 반대 논리도 국가재정의 제한성과 같은 상식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일반 지지자는 몰라도 기본소득 전문가 중에선 그러한 상식 자체를 부정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그 ‘상식’을 잘 알면서도 왜 기본소득론자들은 ‘보편성’과 ‘등가성’을 특징으로 하는 기본소득제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본소득, 왜 보편적이고 등가적인가

기본소득과 관련, 널리 퍼진 중요한 오해가 하나 있다. 바로 기본소득제를 통상적인 소득 재분배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재분배가 아니며, 재분배와는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다. 전문가조차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례가 자주 보인다.

재분배(redistribution)란 일정한 소득분배 상태를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간주하면서도, 조세 등의 수단으로써 그것에 일정한 변경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기본소득은 현재의 소득분배 상태가 잘못됐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이를 교정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론자들은 지대를 걷어서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주장하곤 한다. 왜 지대인가? 전통적으로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땅을 인류 모두에게 똑같이 속한다고 간주했다. 이에 따르면 땅에서 나오는 산물도 인류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땅에 사유재산제도가 적용되어, 마땅히 그 주인이어야 할 사람들이 땅의 법적 주인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재산은 도둑질이다’라는 오랜 경구는 바로 이런 사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땅의 법적 주인으로부터 지대를 모조리 거둬들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겉보기에 이는 통상적 재분배와 비슷하지만, 그 원리나 동기 등의 면에서 전혀 다르다. 지대를 걷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기존 분배상태가 잘못됐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 교정(correction)은 그 자체로 정당한 일이 된다. 반면, 보통의 소득 재분배는 외부의 어떤 사정─예컨대 불평등 심화, 빈곤 만연─에 의해 그 사회적 필요성이 주어진다. 다른 한편, 지대를 걷어 나눠줄 때는, 땅은 인류 모두의 것이니 공동체에 속한 모두를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며, 여기선 나이나 성별, 또는 각종 사회적 특성에 따른 차별은 있을 수 없다. 기본소득이 보편성과 등가성을 본질로 하는 것은 그래서다. 보통의 소득 재분배는 필요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하여 재벌 회장에게까지 공적 수당을 제공할 필요는 없는 반면, 식구가 많아서 필요가 더 큰 가구, 어떤 불운의 결과 소득이 더 낮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재분배되는 게 상식이다.

지난 2020년 8월 기본소득당, 녹색당, 여성의당이 기본소득연석회의의 출범을 알리고 있다. 지난 총선 이후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기본소득에 찬성입장을 보이면서 기본소득이 진보의 독자적 정책의제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기본소득, 급진적 주장인가 공상인가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매우 급진적인 주장인 것도 같다. 현실의 소유제도까지 건드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급진성은 가짜 급진성이다. 첫째, 기본소득론은 위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이 소유제도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유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토지소유제도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할 것 아닌가? 기본소득론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지급을 위해선 지대가 계속해서 발생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러려면 현 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 탄소세 같은 것을 걷어서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다. 거액의 탄소세가 계속 발생해야, 즉 기업들이 환경오염물질을 대량으로 계속해서 배출해야 기본소득제는 유지된다.

기본소득론의 급진성이 의심스러운 두 번째 이유는, 거기에선 사회구조, 특히 계급 갈등에 대한 고민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십분 양보해서, 지대를 거둬들일 수만 있다면, 소유제도 재편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기본소득제만 시행되어도 좋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가능할까? 지대를 걷는 것은 땅을 가진 자산계급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인데도 이러한 저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심각하게 논하는 기본소득론자는 찾기 어렵다. 그들은 지대의 부당성을 말로써 주장할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기본소득보다 훨씬 ‘화끈한’ 유토피아도 얼마든 그릴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비현실성 외에도 기본소득론에는 중요한 결함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위해 쓸 수 있는 재원이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현재의 분배가 잘못되었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지대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수많은 역사의 현자들이 그런 주장을 했고, 그 과정에서 논리도 탄탄해졌다. 그러면 다른 유형의 소득은 어떤가? 근로소득을 예로 들어보자. 분명 우리 사회에는 최저임금의 수십 배를 버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소득은 부당한가? 혹시 최저임금의 몇 배까지는 정당하지만 그 위로는 부당한가? 그 기준은 어디인가?

이는 기본소득론에 매우 불편한 질문이지만,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 질문이다. 또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의 본질적 특성인 보편성과 등가성은 그것이 재원으로 삼는 소득의 성격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대를 거둬들였다면, 이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n분의 1’로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설령 그 돈이 이재용 씨에게 간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순 없겠다. 그도 이 사회의 일원이고,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토지’의 정당한 공동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근로소득에서 걷어간 세금을, 나보다 훨씬 부자인 이재용 같은 사람에게까지 동등하게 나눠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민으로서 내가 나의 정당한 소득의 일부를 포기해 세금을 내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약자를 도움으로써 우리 공동체 유지에 기여하리라는 믿음 내지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기본사회를 위한 ‘진짜’ 무기는?

이렇게 보면, 통상적인 재분배가 기본소득보다 더 나아 보인다. 그것이 기본소득보다 덜 화끈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상위법인 헌법을 포함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에서 탄탄하게 인정되고 있으며, 거기에 사용될 수 있는 재원이 무궁무진하다는 강점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재분배는 선별적이고 차등적인 성격을 띠는 게 당연하다. 이는 단순히 재원의 제한성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국가는 선별적·차등적인 재분배정책을 달성할 역량을 빠르게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면, 개인의 경제상황에 대해 해당 개인보다 국가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당장 국세청 연말정산만 떠올려보라. 글머리에서 인용한 연설에서 이재명 대표는 부자들에게도 똑같이 지급하고 차등적으로 회수하자고 주장했다. 대체 왜 그러는가? 회수할 거라면 애초 주지 않는 게 효율적이고,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정의 관념에도 부합한다.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기본사회’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계급적대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부자에게도 똑같이’라는 흐리멍덩한 구호로는 부자들의 지지조차 받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더 많이 뽑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차라리 낫다. 우리 사회를 더 공정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물론 그러한 공정과 안전은 분배의 영역에서만 추구할 필요가 없고, 사실은 그런 식으로는 달성될 수도 없다. 그것은 경제의 다른 영역, 즉 생산(근로환경, 임금제도 등)과 소비(주거, 의료, 교육, 돌봄 등 공적 서비스)를 포함하는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골고루 추구해야 한다. 이런 종합적인 시야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도 기본소득론의 중요한 결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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