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레가 지나면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는다. 시대는 암울하고 절박하지만 그럴수록 희망가를 부르련다. 코로나 이후 사회는 6대 위기 - 불평등의 극대화와 민생의 위기, 동아시아 전쟁의 위기,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디지털/4차산업혁명과 노동의 위기, 간헐적 팬데믹의 위기, 공론장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기 - 를 맞고 있다. 우리는 파국을 맞느냐, 전혀 다른 사회로 이행하느냐의 기로에 있다. 종점에 서서 새롭게 펼쳐질 하늘을 보며 2022년이 6대 위기 극복의 원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의 극대화와 민생의 위기다. 2018년 통계를 보면, 한국의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86%를 차지하였다. 이는 2009년의 44.38%에서부터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박근혜 정권 말기인 2016년의 47.76%,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에 48.79%, 2018년에 48.86%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월간 노동리뷰>) 부동산 등을 포함한 자산 불평등은 더욱 극심하여 대략 70-80%에 이른다. 코로나 이후인 2020년 3월 18일에서 11월 30일 사이에만 전 세계적으로 억만장자의 부가 3.9조 달러(4,648조 원)나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Oxfam, <불평등바이러스The Inequality Virus>), 한국 사회도 더욱 극심해졌으리라 본다. 주지하듯, 불평등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슈퍼 갑부 8인의 재산이 세계 인구 절반인 36억 명과 비슷하며, 전 세계 억만장자 2,153명이 46억 명보다 많은 부(富)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한 기업의 임금 격차가 300배에 이른다.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 그 중에서도 생산수단의 사유와 독점 때문이다. 이 체제에서는 자본과 생산수단과 정보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런 조건에서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늘 크기 때문에(r>g), 소득 수준별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획기적으로 증대하여 부과하는 등 이를 상쇄할 공공정책이나 제도를 집행하지 않는 한 불평등은 심화한다.”(토마 피케티, <21세기자본>) 여기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자본-국가-보수언론-사법부-종교권력층-전문가집단과 어용지식인’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이 견고하게 카르텔을 형성하며 노동자와 서민을 수탈하였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공공영역을 사영화하고 노동을 유연화하였으며 금융의 수탈을 극대화하였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는 공식 848만여 명, 비공식 1,100만에 달하며 이들의 평균 월급은 172만 8천 원에 지나지 않는다.(<통계로 본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 구조 안에서 기술격차, 교육격차, 정보격차가 더욱 불평등을 심화하고, 상층과 하층의 네트워크 차이는 다시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글로벌자본세, 부유세 등 조세혁명, 살찐고양이법, 보편적 복지의 강화, 기본소득, 기본자산제, 교육개혁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지만,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지 않는 한 어떤 대안도 미봉책에 그친다. 새로운 사회주의를 목표로 의료, 주택과 토지, 교육, 교통, 데이터, 로봇을 공공화/무상화하는 경로를 통하여 사회연대소득제와 노동자 자주관리제, 모든 생산수단의 공유로 나아갈 때 평등한 사회는 가능하다.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도 고조하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 하에 조직된 전후 세계자본주의는 2008년 세계 금융공황을 기점으로 생산성과 이윤율이 대폭 하락한 채 장기불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은 장기불황의 위기를 합법을 가장한 금융수탈로 미봉하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IF)가 2020년 11월에 발간한 <세계 부채 모니터: 부채 쓰나미의 공격(Global Debt Monitor: Attack of the Debt Tsunami)>에 따르면, 작년 말까지 “전 세계 부채 총액이 272조 달러(약 30경 3,062조 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금융 부문 외 부채는 2019년의 194조 달러(240%)에서 올해 210조 달러(GDP의 274%)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부채도 심각한 수준이다. 2021년 5월 현재 “세계의 정부 부채는 79조 9,458억 달러에 달한다.”(https://commodity.com/) “이는 2021년도 예상 세계총생산(GWP) 91조 311억 달러의 87.8%에 달한다.”(https://www.statista.com/) 이 부채는 줄기는커녕 시간당 500만 달러 이상 늘고 있어 부채가 GDP나 GW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급속히 늘고 있다. 2020년 미국의 GDP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133.96%에 달한다. 생산성이 저하하자 미국은 이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저가 상품으로 메우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막대한 무역적자를 면하지 못한 채 유출한 달러를 자국의 금융시장으로 재유입하는 달러환류정책을 펴고 있다.(한지원) 이것으로 금융패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는 대폭 저락하였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경제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태평양을 내해(內海)로 간주하고 전략을 구성한다. 이 토대 위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소련 대신 새로운 적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상실한 정당성을 회복하고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패권을 유지하고 무기 수출로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중국 포위 전략을 강행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이 첨예하게 마주치고 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북한 핵 제거를 명분으로 작전계획 5015에 따라 언제든 북한을 폭격하고 침공하여 김정은 위원장의 참수작전과 북한 점령을 수행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이 적폐의 핵심인 미국에 너무나도 굴종적인 외교를 추진하는 바람에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하였다. 당장 시급한 대안은 핵과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맞바꾸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보법 폐지, 공동의 교과서, 물자와 사람과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와 협력 등의 경로를 통하고 남북연합과 연방제를 매개로 하여 완전한 통일의 길로 가야 한다.

기후위기는 임계점을 넘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기후위기로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과 수십 억 마리의 동물이 죽고 있다. “지구촌은 매년 36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고 이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Hannah Ritchie and Max Roser) 주지하듯, 1만 년 동안 4도 가량 오른 지구의 평균기온이 최근 1백년 만에 1도가 상승하였다. 시속 4㎞의 속도로 걷던 인간이 시속 100㎞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로 가는 것처럼, 25배에 이르는 빠른 속도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대형 산불, 역대 급의 홍수, 폭설, 가뭄, 폭염, 한파, 태풍, 빙하의 소멸, 미세먼지가 일상화하고 있다. 빙하가 녹고, 바다의 수면은 매년 평균 3.4밀리미터가 높아지면서,(https://sealevel.nasa.gov/) 해안선이 점점 육지 안 쪽으로 들어오고 섬나라들은 물에 잠기고 해일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동식물의 38%가 멸종위기에 놓였다. IPCC의 보고서는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지 않으려면 금세기 말까지 지구 온난화를 1.5℃로 제한해야 한다. 이는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을 2030년까지 약 45%를 감축하고 2050년에는 순 영점에 도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시급하고 전례 없는 사회 경제적변화가 필요하다.”(Climate Action Summit, 2019)라고 말한다. 

도시화, 인구의 증대, 인간중심주의, 과학과 이성의 도구화, 개인의 탐욕 등도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화, 성장주의 때문이다. 탈성장과 탈자본을 향하지 않는 대안은 별다른 변화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성장과 자본은 한 몸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확대재생산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에 이 체제가 유지되려면 “세계 GDP는 매년 2∼3% 성장해야 한다. 3% 성장은 23년마다 세계 경제 규모를 두 배로 늘린다는 것이며, 그리고 계속해서 이미 두 배가 된 상태를 다시 두 배로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 우리는 이제 400년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를 상상하고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30년을 통해서 보았듯이, 탄소세 등 모든 대안이나 혁신적이고 참신한 개혁책조차 자본주의는 결국 상품화하여 무력화하였다. 이 체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 정치와 경제, 산업, 과학기술, 심지어 이것과 거리두기를 해야 할 예술과 학문, 종교마저 더 많은 화폐를 증식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강제한다.

4차 산업혁명은 먼 미래의 일인가? “2020년에 한국 제조업 일자리 10,000개 당 로봇 대체율은 868대에 달한다.”(세계로봇협회) 4차 산업혁명이 재현의 위기 등 여러 위기를 야기하지만 노동의 위기만도 심각하다. 로봇화에 의한 일자리 대체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다. 노동은 점점 고스트 워크(Ghost work)로 대체되고 있다. “조앤이란 여성이 아마존닷컴이 운영하는 엠터크에서 음경 사진을 거르는 일을 매일 10시간씩 수행하고 40달러를 버는 것처럼,”(메리 그레이 외, <고스트 워크>), 이들은 법적 지위도, 조합도 없이 인공지능이 놓친 부스러기 일을 하며 노동자로 존재조차 하지 못한다. 이보다 더한 것은 노동운동이 무력화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거부를 강하게 조직하면 자본은 생산이 차질을 빚고 이윤이 줄어들기에 마지못하여 협상에 나서거나 양보했지만, 이제 자본은 로봇으로 대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인류사회가 로봇봉건제 사회로 퇴행할 수도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생산성은 사람의 수백에서 수천 배로 날로 증대되고 있기에 0.0001%의 로봇 소유주와 플랫폼 기업 소유자가 거의 모든 가치를 독점하며 노동자들을 농노처럼 부릴 것이다. 이의 대안은 과학기술을 자본으로부터 분리하고 로봇의 사회화와 노동시간 단축, 인간과 로봇의 노동과 협업을 사회적 합의로 정하는 것이다. 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사람살이의 핵심인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 12월 22일 현재 확진자가 2억 7천만 6백 9십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들도 538만 7천여 명에 이른다. DNA를 역전사하면서 실수가 자주 발생하는 RNA-바이러스의 특성상 수많은 변이들이 만들어지고 델타 변이와 오미크론 변이는 백신을 무력화하고 돌파감염까지 일으키고 있다. 쉽지 않지만 설혹 내년에 코로나를 종식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는 4-5년 주기로 또 다른 팬데믹을 맞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빈틈’의 숲마저 파괴한 탓과 세계화 때문이다. 메르스든, 에볼라든, 사스든 숲에서 수천만 년에서 수억 년 동안 숲 속의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던 바이러스들이다. 하지만 완충 구실을 하던 숲마저 사라지자 이 바이러스들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인수(人獸) 공통의 바이러스로 변형을 하고, 그 중의 하나가 세계화의 고속도로를 타고 퍼지며 팬데믹을 일으키고 있다. 선진국의 독점과 이로 인한 백신불평등은 선진국에게 부메랑이 되고 있다. 접종율이 낮은 후진국에서 만들어진 변이바이러스가 선진국의 국민을 죽이고 있다. 조나스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공유하였다. 5조 원을 벌 수 있는데 왜 그리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이를 향하여 그는 “태양을 특허 내느냐?” 라고 답하였다. 그 덕택에 매년 수십 만 명의 어린이가 불구를 면할 수 있었다. 코로나의 대안도 마찬가지다.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백신 맞기 등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과 함께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배려와 복지, 백신의 공유와 세계적 연대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론장(public sphere)도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붕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속되면서 자본과 국가와 거리를 두고 제4부의 역할을 하던 언론들이 자본에 포섭되거나 잠식되기 시작하였다. 디지털 혁명 이후 주술적 담론과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반향실효과(echo chamber effect)가 증대하였다. 유튜버들은 언론 윤리나 대의는 저버린 채 오로지 돈과 이익을 위하여 선동과 조작을 일삼는다. 언론, SNS, 교육, 종교, 지식인의 장에까지 올바르고 정확한 공론을 조성하는 것이 심각하게 공격을 받거나 배제되었고, 공론장의 적인 주술과 광기, 공포, 반지성, 부족주의가 압도하고 있다. 공론장이 붕괴한 곳에 민주주의의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교육과 조직화, 미디어교육도 대안이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화폐증식과 진실성의 싸움에서 늘 전자가 이길 수밖에 없다.

이 위기들의 근본 원인을 추적하면 모두 자본주의로 귀결된다. 이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안도 미봉책임을 뜻한다. 자유로우면서 평등하고 생태적인 사회주의로 담대하게 목표를 정하고, 앞에서 말했듯, 의료, 주택과 토지, 교육, 교통, 데이터, 로봇, 금융을 공공화/무상화하는 경로를 통하여 사회연대소득제와 노동자 자주관리제, 거의 모든 생산수단의 공유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 권력과 자본보다 마음의 평안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나라와 사회를 많은 돈보다 꽃을 더 추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동력이 되는 사회, 모두가 다 같이 존엄하고 평등하며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위기 극복에 당연히 진보당이 선두에 서서 이끌겠지만, 다른 위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대하기를 바란다. 이 위기들은 서로 얽혀 있고 상호침투하기에 한 부문만의 대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위기는 모두 첨예하기에 이 위기를 만든 장본인인 기득권동맹이나 민주당과 연합하는 전술은 이익보다 손해가 큰 정도를 넘어서서 매번 미봉책에 머물 것이다. 

진보당은 8만 당원을 가진, 진보정당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정당이다. 게다가 당원들의 열정과 헌신, 충성도도 가장 크다. 현장에서 견결하게 투쟁한 동지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왜 진보당은 지금 존재조차 없는가. 왜 진보당원들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가. 물론, 정권의 탄압과 공작, 언론과 대중의 배제도 작용했다. 하지만, 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 누구인가? 왜 진보당과 진보진영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 진보당이 먼저 통렬하게 성찰해야 한다. 

필자가 2012년 9월에 민교협 상임의장으로서 ‘노동자·민중 후보 추대를 위한 사회단체·인사 연석회의를 제안하고, 2012년 12월까지 그 회의의 사회를 보며 진보 정당 및 사회 및 노동단체를 망라한 후보 추대 및 이를 통한 진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시작도 하기 전에 압력이 들어왔다. 서로 저 쪽이 오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밤새 고민하며 그 최소 공배수로 지금의 진보당 진영에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에 대해서만 공개적인 사과를, 지금의 정의당 진영에는 유시민 및 국참당 계열과 단계적 분리 선언을 요청했다.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 당의 인사가 개인적으로 필자를 만나 철회를 요청했지만 수용하지 않자 두 진영 모두 이탈했다. 민주노총이 대의원대회, 중집 등을 열어 새벽까지 토론하였지만 결국 참관단체에서 참여단체로 전환하지 못하면서 동력과 원심력을 상실했다. 

억울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진보당은 진보의 분열에 가장 책임이 크다. 그 후에도 사회주의로 이행이나 노동자 민중의 고통보다 정파적 이익을 먼저 선택하는 태도도 자주 보여주었다. 민주당과 연대하면서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기득권 동맹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운동을 진보적으로 견인하는 데도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진보당이 아닌 진보진영의 인사들이 북한을 아직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북한식의 사회주의의 패러다임과 체제의 독자성, 지정학적 위상과 미국이 언제든 폭격할 수 있는 조건들에 따라 북한을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진보당의 당원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북한 체제나 김정은 정권에 대해 무오류, 무결점으로 신격화하며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조차 부정하는 것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지점들에 대해 진보당은 통렬하게 성찰하고 담대하게 새로운 사회주의와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통일의 길을 향한 굳건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동안 진보가 분열된 폐해는 너무도 컸다. 진보의 다양성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영역과 힘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시켰다. 진보 지지층의 절반 이상이 민주당 표로 전환하였고, 나머지는 표가 갈리면서 국회와 지방의회의 권력을 보수 양당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하여 기득권동맹은 더욱 굳건해지고 보수 양당이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 거의 모든 가치와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이 구조 속에서 노동자 민중은 철저히 배제된 채 과도하게 수탈당하여 불평등은 심화하고 상당수가 생존위기에 놓였으며, 개혁은 늘 유보된 채 기득권의 부와 권력은 점점 증대하였다. 민주주의 또한 직접 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와 결합하지 못한 채 보수 양당의 권력을 강화하는 형식기구로 전락했다. 운동은 늘 고립되고,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의 한 맺힌 아우성처럼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민중의 피 맺힌 목소리는 울타리 밖에서만 맴돌았다. 이제 진보는 서로 담대하게 양보하며 한 길로 나아가야 한다. 

분열이 창조적인 분화로 가려면 크게 여섯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자기 당이나 정파의 동일성을 벗어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대량학살의 근본 원인은 평범한 악(한나 아렌트)이나 권위에 대한 복종(스탠리 밀그램)이 아니라 동일성 때문이다. 아이히만에게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했어도 ‘순전한 생각없음’ 상태에서 감행했을까?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의 어린이는 별 거리낌 없이 죽였다. 지금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대량학살이 있기 전에는 혐오발언이 선행한다. 개인이나 집단은 동일성에 갇힐 경우 종교, 이념, 인종은 물론 견해가 다른 이를 타자로 설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는 속성이 있다. 이제 같은 진보끼리 동일성에 갇혀서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배제하여 보수 세력과 친미세력의 권력을 강화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보의 단일화가 무조건 안 된다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할 것이 아니라 협력의 경험과 투쟁을 통해 서로 차이를 소멸시키고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지도부 몇 명이 합의 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노동자와 조직구성원이 공감하고 판단의 공유를 하는, 합리적 토론과 민주주의적 토론과 합의가 가능한 시스템과 공론장을 확보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셋째,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들이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 공세나 부르주아적 소비행위에 빠져서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거나 재테크를 하고 화폐증식의 욕망을 추구하며 계급은 노동자인데 오히려 보수 정책을 선호하는 ‘자본가적 노동자’로 전환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에 맞게 노동자의 사회의식을 고양하고, 계급의식과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세대모순, 젠더모순, 지역모순을 결합하여야 한다. 

넷째,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 시대에 부합한 진보운동이 필요하다. 디지털화와 4차 산업혁명으로 부불노동과 지대, 불안정노동, 플랫폼 노동, 유령노동이 마구 증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부불노동과 지대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한 예로, 페이스북은 24억 명의 사용자들이 무료로 글과 이미지를 페이스북에 올리게 하고 이로 막대한 광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2020년에 페이스북의 매출은 859억 6,500달러이고 순이익은 무려 38%인 326억 7,100억 달러에 이르는데,(https://www.wsj.com/) 고용노동자는 58,604명에 지나지 않는다.(https://www.statista.com/) 롤플레잉게임 마니아였던 한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칼로 난자하여 죽인 후 한 달 뒤에도 게임 속의 악마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메타버스가 매체를 통하여 구체화하면서 현실과 가상이 혼재하고 있다. 현실이 변하였다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식과 극복을 지향하는 진보 또한 달라져야 한다. 자본과 기득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공세와 디지털화와 4차 산업혁명의 진행 속에서 종북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재현의 위기론, 세대론, 지역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대안의 담론과 저항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의식화와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반신자유주의 반자본, 반미 전선의 깃발 아래 이를 지향하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기후위기 극복, 무상의료 무상주택, 교육개혁 등의 정책과 담론 투쟁을 해야 한다. 한 예로 전에는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청년들이 부르주아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최근에 들어 기후위기 극복이 체제의 전환 없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속속 수용하고 있다.   

여섯째, 노동자 비합법적 투쟁과 제도권의 정치가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어야 한다. 의회를 활용하면서도 의회에 매몰되어 변혁 운동을 약화해서는 안 된다. 운동의 이상과 의제를 의회를 통하여 제도화하고 의회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진보적 이상과 의제를 의회 밖에서 운동으로 구현해야 한다. 이렇게 운동이 정치를 좌파적으로 견인하고, 정치가 운동을 고양하도록 해야 하는데, 외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기후위기 하나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회와 한반도 평화체제로 나아가기보다 정파의 이익에 집착한다면, 눈앞의 현안에 집중한다면 진보는 괴멸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와 답은 모두 현장에 있다. 강령도, 정책도, 운동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현장에 따라, 현실의 변화에 따라 강령도 정책도 유연성을 부여한다는 태도의 전환이 필요하다.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Habermas, <New Conservatism-Cultural Criticism and the Historians' Debate>) 6대 위기로 암울하지만, 그리 모순이 심화한 만큼 새로운 하늘이 열릴 가능성 또한 커지고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와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통일을 향하여 담대하게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걷자! 무력감과 진부함에 빠진 노동자와 대중들을 일깨워서 이 목표에 이를 때까지 투쟁하자!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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